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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눈물은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눈을 보호하기 위해 흐르는 생리적 눈물이 있고, 정서적 감정변화에서 오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흘리셨던 영적인 눈물이 있습니다. 이 눈물은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울어야 할 신령한 눈물, 애통의 눈물입니다.
■ 자기를 위한 애통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사람마다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통곡하던 다윗, 주님을 배신하고 닭이 울 때마다 통회했던 베드로, 자신의 죄성을 바라보며 곤고한 자라 애통해 했던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애통은 자아가 깨어지고 부서지는 순간에 느끼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보고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나를 살리고 자식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힘은 이런 눈물에서 시작이 됩니다.
■ 이웃을 위한 애통
참된 애통은 자신을 성찰하고 아파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약점까지도 자신의 허물인 줄 알고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앙인이 흘려야 할 또 다른 신령한 눈물입니다. 내가 이렇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은 누군가 나를 위해 이런 신령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주신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웃과 교회를 살리려는 눈물을 원하십니다.
■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통
여기서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향한 애통의 눈물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조국의 비보를 듣고 찢어지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에스더는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흘리신 눈물이 바로 이런 애통의 눈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곧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포위된 채 일백만 시민이 처참하게 학살당하며 성전은 무너지고 도시는 파괴되고 회개를 모르다가 비참하게 망해갈 조국의 내일을 보시며 안타까이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흘려야 할 눈물이 바로 이 애통의 눈물입니다. 전 민족적인 커다란 정체성 위기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눈물 뿌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안 되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도 새벽마다 밤마다 울며 기도하는 기도의 종들이 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