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복음서에 공히 다 기록이 될 만큼 제자들에게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저자인 마태는 이 사건을 구약에 이미 예언된 내용이며 메시아의 오심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았기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왕의 입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슥9:9,마21:4). 특히 새끼 나귀는 이 사건의 중요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귀 새끼 한 마리를 향하여도 이토록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면 우리의 인생을 향한 계획, 또한 지대할 것입니다.
■ 예수님과 베다니 사람들
이 사건에서 기억할만한 사람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나귀의 주인입니다. 이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요구에 선 듯 응하여 나귀 새끼를 내어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기까지 베다니라는 동네가 주님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이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예루살렘을 오가셨던 고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에도 베다니 마을 앞까지 나가셔서 모인 자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눅24:50-53). 예수님은 아픔과 슬픔, 질병과 고통을 삼키며 살아가던 베다니 사람들의 친구였고 희망이었습니다(마26:6-13,눅10:38-42,요11:1-44). 때문에 그 마을 사람들은 주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 나귀 주인의 헌신
이런 관계성 속에서 여기 무명의 나귀 주인이 나귀를 내어 준 것은 단순히 나귀라는 짐승을 내어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준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주권의식(Lordship)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내 삶의 목적이 주님께 온전히 연결되는 영광의 단계를 말합니다. 바로 그때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게 되는 신비의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신이고 이것이 사랑입니다.
■ 봉사와 섬김의 의미
“주가 쓰시겠다.” 말씀하실 때 베다니 사람들은 “주님이 필요하시다면 당연히 드려야지요.”라고 생각했습니다(마21:3).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주’라고 표현한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참된 헌신과 봉사와 섬김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여기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헌신, 사랑이 없는 봉사, 감사가 없는 섬김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자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복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받은 후에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일하면 하나님께서 크게 부어 주십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자, 묶여 있는 자를 하나님은 쓰시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역의 신비가 있습니다. “아멘,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