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8.28.Grace Church Message 朴 祥栄宣教師
私たちの中に語ってくださる父の霊
우리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
The Holy Spirit of our Father who is speaking in us
(本文)マタイ10:20
20. |
語る者は、あなたがた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中にあって語る父の霊である。 |
20. |
For it is not ye that speak,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which speaketh in you. |
20. |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케더린 쿨만(Kathryn Kulman 1907-1976)은 말했습니다. ‘나의 삶 가운데에서 성령님의 모든 능력의 비밀이었다 내가 해야만 되는 일은 단지 그분께 나의 삶을 굴복시키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성령님은 하나님의 가장 깊은 부분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고전6: 19)
성령님은 구약성경에 히브리어로 루아흐로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신약에는 헬라어로 푸뉴마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이름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신(창1: 2), 주의 성신(시51: 11), 여호와의 신(사11: 2), 주 여호와의 신(사61: 1), 신약에는 아버지의 성령(마10: 20), 하나님의 성령(엡4: 30), 주의 영(고후3: 17-18), 예수의 영(행16: 7), 그리스도의 영(롬8: 9), 양자의 영(롬8: 15), 하나님의 영(고후3: 3), 아들의 영(갈3: 6),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빌1: 19)등입니다. 성령님의 이름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총독이나 임금 앞에 끌려갈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초대교회 시절 총독이나 임금 앞에 끌려가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극도의 위기의 순간에도 성령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의 길을 알려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현실 가운데서 만나는 일들은 사실 순교보다 더 어렵거나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구체적인 말씀과 지혜와 은혜를 주셔서 극복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마태복음은 한 유대인 마태가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 소개한 책입니다. 예수님은 오랫동안 이스라엘백성들이 고대하고 기다렸던 유대인의 왕이시며 메시아이시다 고 증거합니다.
마태는 알패오의 아들로 세리였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세리의 일을 하였는데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곧 돈방석의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는 행 1:13절에 마지막으로 언급됩니다. 마태는 이 복음서를 AD58-68년경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AD33년경이라고 생각할 때 마태가 이 책을 쓴 때는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었을 때라고 생각이 됩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 약속된 메시아이며 왕이심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신데 그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동방박사의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이십니다.
(2:2) 그는 선지자의 약속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습니다. (2:6)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례 받은 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3:17)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 왕이십니다. (마21: 5)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인자이십니다(26:64)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이 왕임을 빌라도 앞에서 선포했습니다. (27:11)
우리가 마태복음을 읽을 때 왕이신 예수를 생각하면 더욱 잘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내용을 크게 보면 11:2까지는 왕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11:2에서부터 끝까지는 왕을 거절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가르치시다가 후에는 12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그 중에서도 왕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마8: 1-11:2까지는 왕적인 권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질병과 귀신과 죽음과 자연에 대한 왕적 지배의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 마10: 20은 특히 예수님은 우리의 생애 가운데 임재하시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생애에 대해서 왕적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배하시고 절대주권을 가지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풍성함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사람은 열심히 수고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열심히 대학에서 공부하였지만 졸업식에서 취직된 사람이 10%밖에 되지 않는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은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길이 열리지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고백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하룻밤을 지새워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얻은 것이 없이 허탕을 쳤습니다. 다음날 그는 피곤한 몸으로 바닷가에서 배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온 것입니다. 해변은 만일 바람만 불지 않고 파도소리만 없다면 설교하기에 좋은 장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밀려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결국 베드로의 배를 빌려서 바다 위에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해변에 앉은 많은 사람들은 푸른 바다 위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많은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것은 배를 빌려준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말씀을 마친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문제를 이미 파악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의 고백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 리이다.’(눅5: 5) 베드로는 주님의 음성을 순종함으로 결국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두 배 가득 잡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축복과 평안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막힌 담과 벽이 있다 할 지라도 그리스도는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시는 문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문을 드나들 때에 우리는 들며 나며 꼴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풍성함으로 인도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유로 인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몸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단지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질병은 인간을 약하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질병은 단지 현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모세의 시대에도 질병과 죽음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행진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강한 독을 가진 불 뱀들이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였습니다. 뱀의 독이 몸에 들어가자 그들은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햇빛 아래서 독에 감염되어 죽어져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죽어져 가는 그들에게 치유와 삶을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 달고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죽어져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놋 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아났습니다. (민21: 9)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이 장대 끝에 매달린 놋 뱀이 자신과 같음을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는 자는 죄와 마귀의 저주의 독에서 해방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스스로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 우리 가운데는 성령님이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죽음과 멸망에서 해방시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고귀한 죽음으로서 우리의 죄의 대가를 다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현실의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에 우리는 짜증이 나고 불안하고 피곤하고 때로는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십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냄새 나는 양 떼들을 몰고 초장을 찾아서 인도하고 때로는 야수들을 만날 때에는 그들을 물리치고 양을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권태롭고 단조로운 생활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의 마음이 기쁨으로 넘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단조로운 삶 가운데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그는 항상 그의 앞에 계시는 주를 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항상 살아계신 주를 뵙는다면 그 사람은 결코 삶이 무료하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이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다윗의 우편에 항상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우편에 항상 계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하나님을 항상 느꼈기 때문에 마음이 기뻤습니다. 그의 입술도 즐거워서 수많은 시편을 썼습니다. 또한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날 성령으로 충만하여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성령님의 충만한 가운데 이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므로 우리는 즐거움과 희망에 거할 수 있습니다. (행2: 25-26)
❀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소망이 없는 삶은 불행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음악이 없어도 춤을 춘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망은 인간의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입니다. 소망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힙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망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수행한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생의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의 주시는 소망을 깨닫고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은 소망을 주십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호렙산 굴 속에서 받았던 것과 같은 지극히 세미한 음성 속에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가장 강력한 동기와 힘의 근원이 되게 합니다. 소망은 현실을 넘어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기업과 그의 영광을 보게 합니다. 바울은 그의 삶을 주께 붙들림을 받은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엡1: 17-18)
❀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주기 전에 씨앗을 주십니다. 열매는 그 주신 씨앗을 잘 간직하고 인내하면 맺히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씨앗의 비유를 가지고 열매 맺는 삶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씨앗을 길가에 뿌리면 곧 새가 날아와 그 씨앗을 먹어 버립니다. 어떤 씨앗은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집니다. 싹이 나지만 뿌리가 약해서 햇빛이 나면 곧 시들어집니다. 어떤 씨앗은 가시밭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가시가 기운을 막아 자라지 못합니다. 어떤 씨앗은 좋은 옥토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곧 무성하게 자라 하늘을 덮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 운다는 것은 말씀을 받아 굳게 간직하여 인내로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의 말씀을 받아 잘 믿고 간직하여 인내로서 그 성취를 기다리면 하나님은 때가 되면 그 열매를 주십니다. 우리가 가지요 주님은 포도나무입니다. 열매는 우리가 스스로 맺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할 때에 그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향기 있는 맛있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열매는 인간이 만들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고 인내하면 때가 되면 우리의 삶에 열매는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막4: 20)
6. 하나님은 우리를 준비시킵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준비시킵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의 앞에서 자신을 바라다 볼 때에 내가 정말로 주님 앞에 자격 있는 인물이다 고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 부름을 받았을 때에 두려워 떨며 혹은 거부를 했습니다. 모세가 그러했고 이사야 와 예레미야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 부름을 받는 것은 우리의 의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도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 송아지의 재로서 육체가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우리를 정결케 하여서 그리스도의 일을 할 수 있게 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의 주님을 향한 준비는 공부도 많이 하고 현실문화도 잘 이해하여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씻음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속의 피의 귀중한 의미와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피의 메시지를 가지는 것입니다. (히9: 13-14)
❀7. 하나님은 우리를 헌신케 합니다.
우리의 삶은 먹고 사는데 바쁘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교회의 목사님들이나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가 있습니다. 사실 먹고 사는 일도 하나님의 나라의 귀중한 부분입니다. 중세의 로렌스형제는 평생을 수도원에서 청소나 설거지 등을 하며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은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동경의 한 마을의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마치 그의 일이 화가 고호가 그림을 그리듯 신중하게 감사함으로 그의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태도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에게 모세의 글과 모든 선지자의 글 그리고 모든 성경에 쓴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의 핵심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힘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천사 몇 군단을 동원하여 로마제국을 일시에 멸망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킨 예수님이 죽음을 피하거나 이기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죄의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가를 짧은 기록으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볼 때에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변화와 헌신은 강요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그것이 진정 주님의 나라를 위한 변화와 헌신이라면 주님의 성령님의 말씀과 감동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뜨거움은 장작불을 피워서 얻는 뜨거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뜨거움이 물리적인 뜨거움이라면 헌신을 위해서 용광로에 집어넣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을 태울 수는 있어도 변화와 헌신을 가져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변화와 헌신은 조용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에 일어납니다. (눅24: 32)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우리 속에서 말씀하십니다.